1. 비상구

     그 여자애 배꼽 밑에는 화살 문신이 있다. 그걸 새길 때보다는 뱃살이 붙었는지 이제 그 문신은 화살이라기보다는 밧줄 모양이다. 화살촉 부분도 초기의 날카로움을 잊고 끝이 구부러져버렸다. 그런 화살이라면 아무도 못 죽일 것이다. 화살이든 밧줄이든 혀끝으로 그 부분을 핥을 때면 아주 쌉쌀한 맛이 난다. 그럴 때마다 자지러지는 여자애의 키득거림은 좋은 양념이 된다. 

     문신, 그러고 보니 문신한 여자애를 만난 건 참 오랜만이다. 옷을 벗겼을 때, 문신이 나타나면 그 달은 운수대통이다. 허벅지쯤에 다른 남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길수나 영식이처럼 흔하디흔한 이름이라면 더 즐겁다. 허벅지에 옛날 놈팽이 이름을 새기고 다니는 기분은 어떨까. 그게 궁금하여 나는 반드시 물어본다. 야, 넌 허벅지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냐? 그 중 기억나는 대답은, 씨팔, 삼백만 원만 있으면, 이었다. 옛 남자를 지우는 가격이 삼백만 원이라면 싼 셈이다. 인상에 남았던 또 하나의 대답은, 니 이름도 새겨주랴? 였다. 출석부 만들 일 있냐고 비아냥 거렸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치졸한 대꾸였다. 

     
  2. 뚜벅 뚜벅 걷다보니 벌써 25의 끝자락이다. 곧 있으면 26이 되고 내 25를 함께 해준 애인은 29가 된다. 내 25는 가장 불안했고 가장 제 멋대로였고 가장 행복했다.

    나는 곧 26이 될 나에게 줄 과제를 애인과 함께 정리하겠지. 26이 되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

    너랑 함께 커가는 게 뿌듯한 이유.

     
  3. 아버님한텐 내가 제일 사랑스런 여자아이고 그래서 나는 물론 내 가족들까지도 늘 챙겨주셨다. 오빠와의 관계가 예전같지 않아도 아버님은 여전히 여전히 날 예뻐하시고 보고싶어 하신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4. 어제 알게 된 내가 너를 매우 사랑하고 있단 증거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도 전화가 왔었단 흔적만으로도 참 행복하다.

     
  5. 귀얌둥이랑 있으면 북극도 따뜻해

     

  6.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엄마가 어떤 모습일지는 궁금했다. ‘정신병원’ 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괴기한 분위기에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여자 고릴라 같은 모습을 더하면 엄마가 완전히 마쳐서 우리에 갇힌 채 쇠창살을 물어뜯고 있을 거라는 불길한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모실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속장이 다 썩어서 미치지 않도록 예방주사를 맞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버지와 나는 여느 병원이나 다를 것 없는 조용한 복도를 걸어서 여느 병실이나 다를 것 없는 작은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은 약간 어두컴컴한 것을 빼고는 보통 병실이었다.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고 그 중 한 침대에 엄마가 몸을 동글게 말고 문 쪽을 보며 모로 누워 있었다. 모실 할머니가 말한 것과 달리 링거는 매달려 있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보자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엄마의 얼굴도 보기 전에, 문이 반쯤 열려 엄마의 몸을 싸고 있는 얼룩덜룩한 병원복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울고 있었다. 엄마는 내 머리를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았다. 

    "엄마가 미안해, 동구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엄마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엄마 그대로였다. 조금도 미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며칠 전에 할머니에게 고추장독을 안기던 날에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 같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하루쯤은 갑자기 미쳐버리는 수가 있을 것이다. 단 하루 미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남은 인생 전체를 미친 상태로 살게 된다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 동안, 그리고 그날, 엄마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하루가 아니라 사흘쯤 미치더라도 뭐라고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서 아마 나보다 작고 더 말랑말랑한 촉감을 떠올렸을 것이다. 엄마는 몇 번이나 나를 끌어안고, 쓰다듬고, 뽀뽀하고, 엄마 아들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자꾸 내 얼굴에서 영주가 보이는지 울고 또 울었다. 

     
  7. 나는 세상에 대한 죄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다짐

     
  8. 살짝 추워진 날씨가 날 설레게 하지만 낙엽 이불 위를 사각 사각 밟을 수 없게 될 날이 한 치 앞인 것은 아숩다.